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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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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면 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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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방광면의 지상, 지하, 천변, 광석, 대촌, 유산, 견곡, 월곡, 수한, 당촌, 훈포, 용전, 용내, 둔전 등 14개 마을과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원부의 소의면(所義面)의 상촌, 하촌, 연파정, 공북, 온동, 당동, 난동, 구만, 방광 등 9개 마을에 용강면(龍江面)의 사우, 본신 마을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방광면과 소의면의 이름을 결합해서 광의면이라 개칭하고 연파, 지천, 대산, 수월, 방광, 대전, 온당, 구만 등 8개 리를 관장한다. 동쪽으로 마산면, 서쪽으로 용방면, 남쪽으로 마산면과 용방면, 북쪽으로 산동면에 닿았다.

위치

동쪽은 마산면과 서쪽은 용방면과 구례읍과 서시천을 경계로 닿았고 북쪽은 산동면과 접경하고 있다. 천은사 계곡에 흐르는 소아천(小兒川) 유역 지역이다.

당동(堂洞)마을 - 온당리 -

기본현황

(2008. 12월 현재)

기본현황
인구(명) 주택(호) 경지면적(ha) 임야(ha) 기타
총인구 면적
26 18 44 24 33 30 2.5 27 -
마을형성 및 지명유래

설촌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 중기부터 김해 김씨가 들어와 설촌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당시 근처에 미륵탑(彌勒塔)이 있어서 탑동(塔洞)이라 하였고 조선 시대 초에는 100여 호에 이르는 대촌이었다고 하며 조선조에 국태민안을 위한 지리산 남악사를 본 마을 북편에 건립(연대미상)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며 남원부사를 위시한 근읍(近邑) 수령(首領)의 왕래가 빈번하여 마을 주민들의 번거로움과 피해가 많아 타처로 이주를 많이 해버렸다. 1499년에는 남원부 소의방 탑동이라 하였고 그 후 1908년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남악사가 폐사되어 당(堂)이 없어졌다하여 당몰이라 칭하다가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법정리로 온당리 당동으로 칭하였다.

전설
  • 궁안 - 해방직후 남악사당터에 유씨란 사람이 몰래 묘를 써 놓자 크게 가뭄이 들어 인근 주민들이 괭이 호미 등을 들고 와서 그 묘를 파내고 주민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큰비가 내려 그 해 모내기를 쉽게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그 터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자생조직
  • 상조계 - 1960년에 조직 20여 명으로 구성 애경사시 상부상조.
  • 절약계 - 1975년 11명으로 조직 근검절약과 친목을 목적.
  • 기 타 - 부인회, 남녀 노인회.
문화유적
남악사지(南岳祠址)
마을 북편(궁안)에 있다. 조선 시대에 지리산신사당인 남악사가 큰 규모로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에 폐사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악사지 지표조사 보고서가 있다(목포대 박물과).
비석(碑石)
남악사터 아래 마을 북편 남악사 객사(客舍)터에 조선 중기의 남원부사 민종열(閔鍾烈)의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져 있다.
석산재(石山齋)
130번에(마을회관 옆). 김해김씨의 제각으로 삼간의 전통한옥이다. 1980년대 초에 건축한 것이다.
남악정(南岳亭)
마을회관 앞, 마을의 정자로 2002년도에 건축하였다. 현판은 운암(雲菴, 趙鏞敏) 선생의 글씨다.
민속놀이
  • 정월초하루에 마을 공동세배와 대보름날에 마을 앞 노변(路邊)에서 달집 태우기와 농악놀이로 안녕(安寧을 기원해 오고 있다.
기타
마을의 주막
마을 아래 삼동굴 언저리 당동 마을 입구길과 난동마을 입구길 삼거리에 1920년대부터 김동우가 주막을 운영하여 온당리 삼동민(三洞民)과 오가는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으며 1970년대 초 김동우가 사망하면서 없어지고 그 터 역시 1989년 경지정리와 함께 경지화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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