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의면 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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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방광면의 지상, 지하, 천변, 광석, 대촌, 유산, 견곡, 월곡, 수한, 당촌, 훈포, 용전, 용내, 둔전 등 14개 마을과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원부의 소의면(所義面)의 상촌, 하촌, 연파정, 공북, 온동, 당동, 난동, 구만, 방광 등 9개 마을에 용강면(龍江面)의 사우, 본신 마을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방광면과 소의면의 이름을 결합해서 광의면이라 개칭하고 연파, 지천, 대산, 수월, 방광, 대전, 온당, 구만 등 8개 리를 관장한다. 동쪽으로 마산면, 서쪽으로 용방면, 남쪽으로 마산면과 용방면, 북쪽으로 산동면에 닿았다.
위치
동쪽은 마산면과 서쪽은 용방면과 구례읍과 서시천을 경계로 닿았고 북쪽은 산동면과 접경하고 있다. 천은사 계곡에 흐르는 소아천(小兒川) 유역 지역이다.
온동(溫洞)마을 - 온당리 -
기본현황
(2008. 12월 현재)
인구(명) | 주택(호) | 경지면적(ha) | 임야(ha) | 기타 | ||||
---|---|---|---|---|---|---|---|---|
남 | 여 | 총인구 | 면적 | 논 | 밭 | |||
43 | 58 | 101 | 46 | 152 | 44 | 5 | 103 | - |
마을형성 및 지명유래
1500년경 전주이씨가 설촌 하였고 1600년경에 김해김씨 「윤구(允九)」가 입촌하였으며 1700년경에 전주최씨 문성공(文成公) 하(河)의 후예「명원(鳴元)」이 입촌 정착 한 후 그 손들이 번성하여 세 성씨 중 전주 최씨가 가장 많으며 1950년대에는 약 100여 호의 대촌으로 되었다가 여순사건과 6.25난을 겪으며 산간마을로써 피해가 심하자 각지로 이사를 많이 해 버렸다. 1592년(선조 25)에는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1708년(숙종 34)에 운봉진에 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다시 남원부에 속한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의면 온당리 온동으로 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 옛날부터 온수(溫水)가 난다고 하여 “온수골”이라 부르다가 온동 이라고 하였다.
전설
- 마을 건너 뜸 뒤 “골론계”라는 노에서 온수가 솟아 그 온수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곧 낳았다는 소문이 퍼져 나환자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어 (당동 마을에 문등골이라는 곳에서 모여 살면서 왕래하였던 것으로 추저예 마을 주민들은 나환자들의 혐오감과 불치병이 마을에 전염될까봐 고심하던 중 온수가 나오는 구멍을 솥뚜껑으로 덮고 묻어 버였다는 설이 전해 오고 있다. 또 한편 산동면이 이평리의 윤문효공(允文孝公)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화이 깊어지자 본 마을의 온수를 드려 그물을 마시고 어머니의 병환이 쾌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자생조직
- 위친계 - 본동과 건너뜸으로 나눠져 조직되어 특히 상사시 합심하여 일을 치룬다.
- 23인계 - 마을의 활동력이 있는 사람으로 조직하여 마을의 단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계이다.
- 청년계 - 40세 이하 청년들의 모임체.
- 6인계 - 각 성씨별로 대표들의 모임체.
- 기 타 - 새마을회, 부녀회, 남녀노인회.
문화유적
- 추원재(追遠齋)
- 마을 뒤, 전주 최씨 종각으로 전통한옥으로 1912년경에 건립, 대문을 성근문(省勤門)이라 일컫는다.
- 보호수
- 마을 당산, 마을 당산에 느티나무 4그루, 창고 옆 느티나무가 있다.
- 정자(亭子)
- 마을 당산, 1985년에 건립한 온수정(溫水亭)이 있다.
- 돌탑(塔)
- 마을 입구, 예부터 쌓아진 돌탑이 있다.
민속놀이
- 달집태우기
- 정월 대보름에 마을 입구 돌탑 옆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액운 태우는 마음으로 달집 태우기와 지신밟기 농악놀이를 해오고 있다.
- 광복절
- 매년 광복절이면 마을 중간 결산 보고를 하며 단합과 광복기념 행사를 하며 마을 잔치를 벌인다.
기타
- 주막
- 종래 당동 마을 앞 주막을 애용했으나 1970년대 새마을 사업 이후 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팔아 주막으로 이용하였다.
- 벼락방아*(연자방아)
- 지금의 버스 승강장 또랑가에 있었다. 강태준이 운영하여 왔으나 1940년경에 폐쇄되었고 방앗돌은 석수들이 도구통이나 쇠구시로 만들어 써버려 흔적마저 없어져 버렸다.
- 정미소
- 지금의 마을 창고 옆에 발동기로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그 후 전기모타 시설로 쓰다가 정부 매상제도로 폐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