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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전면 위치도

간전면 마을유래

연혁

간전 마을의 이름을 따서 간전면이라 불렀고 간전, 대평, 해평, 양동, 야동, 치촌, 무수천, 안음, 당산, 대치, 복구, 흥대, 중평, 만수, 수내, 산정, 삼신, 논곡, 효죽, 선창, 상금장, 하금장, 산령, 용지, 백운천, 거석, 중대치, 도장, 백운암, 화정 등 31개 마을과 문척면을 병합하여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간문면이라 개칭하였는데, 1946년 8월 16일에 다시 두 면으로 갈라져 간문면으로 복구하고 간문, 양천, 흥대, 수평, 삼산, 효곡, 금산, 운천, 중대 등 9개 리를 관할한다. 동쪽으로 광양시 다압면, 남쪽으로 광양시 봉강면과 옥룡면, 북쪽으로 토지면, 서쪽으로 문척면과 순천시 황전면과 닿았다.

위치

구례군의 동남방에 있다. 섬진강을 끼고 동쪽으로 경남 하동군 화개면, 서쪽은 광양군 다압면, 남쪽으로 봉강면, 서남쪽은 순천시 황전면과 닿았다. 그리고 서쪽은 문척면과 섬진강 건너 토지면과 닿았다.

간전면 마을

간문리

대평(大坪)마을

조선 중기 영조 때 보성 지방에서 김재원(광산 김씨 현 6대 조부) 일족이 섬진강을 따라 이곳에 이르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처음 이곳을 ‘넓은 들 가운데’라는 뜻으로 한들이라 불렀다. 지금도 한들이라 부르고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평이라 개명되었다.

해평(海坪)마을

조선 중기 약 300년 전 경주 김씨가 지금의 계족산 아래 개울이 넓고 살기에 적합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광산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평지이고 큰 개울과 접해 있어 해평지라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해평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북쪽과 현재 학교 사이를 꽃정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양천리

양동(陽洞)마을

치촌으로 형성시기는 고려 태조 때로 보이나 처음 이곳에 참나무가 많아 목기그릇 제작을 위해 최초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화 유씨와 청주 한씨가 뒤에 산이 높고 앞에 강이 있어 외부 침입이 없고 양지가 발라 피난지로 정착하였다 한다. 면내에서 가장 먼저 설촌되었다는 잼몰(치촌)이 있고 잼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치촌인 잼몰은 지금도 부르고 있고 양천동이라 부르다가 양동이라 불렀다.(따뜻한 양지동 양천동 양동)

야동(冶洞)마을

조선 선조 때(1590년경)로 추정, 잼몰에서 살던 문화 유씨가 밤중에 불빛을 보고 찾아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현재 8대손이 살고 있다. 유 씨 이후 곧 고 씨가 오고 바로 과부가 정 씨 성의 아들 1명을 28세 때 데리고 와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 불무같다고 해서 불무동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문 불무 야(冶)자를 써서 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흥대리

흥대(興垈)마을

조선 선조 때로 추정되는 1,600년경 배 씨가 피난을 와 사람 발길이 없는 상촌골에 정착한 후 제주 고씨가 터를 잡고 문화 유씨와 김해  김씨가 입주하였다고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간전면 안음, 당산, 대치, 복구, 흥대 마을을 병합해 흥대와 대치 두 마을의 이름을 결합하여 간문면 흥대리라 개칭하였고 1946년에 간전면 흥대리가 되었다. 마을이 형성된 후 여러 씨족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번창하게 됨에 마을터(자리)가 좋아 흥하게 되었다하여 흥대(興垈)라 칭하였다 한다.

대촌(大村)마을

잼몰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나 조선 중종(1,500년 경) 때 의령 남씨 1가구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여진다. 당시 마을세가 확장되면서 흥대리 주변까지 속한 큰 마을을 형성하여 그 규모나 인구로 보아 큰 마을이므로 대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처음 마을이 형성되어 동네가 광대하게 번성하여 흥대천 주변까지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50년 전 갑인년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동네 가운데가 없어졌다. 현재 대촌과 양동 같이 잼몰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제를 지낼 수 있는 전답을 마련하였다.

안음(安陰)마을

조선 숙종 때(1680년경) 파평 윤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초기 정착한 사람이 당산나무로 심었다는 약 4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에 정착한 사람이 수호신으로 심은 느티나무의 수세가 왕성하여 '아니미'로 부르다 안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복구(伏龜)마을

조선 초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청주 양씨 3성씨가 국사봉 산맥의 계곡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중기 갑인년 대홍수로 마을 상부가 유실되고 현 중부 및 하부만 남게 되었다. 마을 중앙에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바위가 있었으나 확인하지 못하였고 복기미로 불려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복구 마을로 개편되었다.

수평리

상만(上萬)마을

조선 13대 명종 22년(1567년)에 제주 고씨가 피난처로 이곳을 택하여 정착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깊은 계곡의 수원이 풍부하며 산(山)과 들이 병합된 야지(野地)로 만인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터라 하여 만수동이라 불러오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하마을로 분동되면서 이 중 윗마을인 이곳을 웃만수동 또는 상만(上萬)이라 칭하게 되었다.

중평(中坪)마을

조선 12대 인조 때로 추정되는 1650년경에 경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큰 부자(富者)가 생긴다는 마을로 전해오고 있다. 고종 32년(1895년) 전국의 목·현을 군(郡)으로 고치면서 구례군이 되었을 때 간전면사무소가 이곳에 개설되었고 본 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평원지(平原地) 마을이라 중평지(中坪地)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평리 중평(中坪)마을로 개칭되었다.

하만(下萬)마을

조선 13대 명종 22년(1567년)에 제주 고씨가 피난처로 이곳을 택하여 정착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상만 마을과 같이 설촌된 마을로써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아래 만수동 또는 하만(下萬)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산리

산정(山亭)마을

조선 중종(1640년) 제주 고씨와 밀양 박씨가 입주하여 삼신동(三神洞)에 정착하면서 각시봉(玉女峰)과 돌곳봉 사이에 취락을 형성하였다 한다. 각시봉과 돌곳봉 사이에 광주리를 놓고 실을 올리는 자리에 마을이 위치한다하여 아래 정자로 통용되어 산정(山亭)이라 칭하였다 한다.

수내(藪內)마을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경주 이씨가 오행설(五行說)에 따라 소반터(밥상터)를 찾아 자리를 잡은 것이 시초로 그 후 김해 김씨 일파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밥상을 받은 자리와 같다는 오행설에 따라 소반 또는 수반이라 불러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주변이 팽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 숲 안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수내(藪內)로 개칭되었다.

효곡리

효죽(孝竹)마을

조선 18대 현종(1670년)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 강화 위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그 후 경주 정씨와 반남 박씨가 입주하여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1948년 여순 사건 때 마을이 전소되어 반란군의 침입으로 전주민이 소개(疏開)되었다가 1953년경에 복원(復元)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논곡리, 효죽리, 선창리를 병합하여 효죽과 논곡의 이름을 따서 효곡리라 하여 간문면에 편입되었다가 서기 1946년에 간전면에 편입되었다.

논곡(論谷)마을

조선 중엽(1630년경)에 밀양 박씨와 현풍 곽씨가 난(亂)을 피하여 이곳에 와 정착하여 취락이 형성되었다 하며 그 후 동네에 초계 정씨가 입주하여 지금의 선창(仙昌)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이 마을에 예속되어 같은 마을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마을의 위치가 '배'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중심부가 되는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이곳이 배의 노를 젓는 제일 중요한 곳이란 뜻으로 뇌실 또는 논실로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논곡(論谷)으로 개칭되었다.

금산리

금산(금장)마을

조선 영조 31 을해년(1755)에 경주 이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본 마을(下錦帳)이 설촌되었고 그 후 다른 성씨들이 차츰 입주하여 상금장(上錦帳), 용지동(龍地洞), 매재(鷹嶺) 등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 정착한 경주 이씨가 백운산 지맥인 속초봉에서 금맥(金脈)을 발견하여 채금(採金)하였다 하여 금쟁이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하여 상·하금장, 산령, 용지동을 병합하여 금장과 산령의 이름을 따서 금산리라 부르고 간문면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에 다시 간전면에 편입되었다.

운천리

하천(荷川)마을

조선 숙종 병자년(1696년)에 경상도에서 섬진강을 건너 총기류를 만들었던 장인 방하천(房荷川)이란 사람이 피난처로 이곳에 정착한 뒤 달성 서씨와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최초로 정착한 방하천이란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하천(荷川)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본래 간전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백운천과 하천의 이름을 따서 운천리라 하여 간문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 1946년 간전면에 편입되었다.

백운천(白雲川)마을

조선 중종(1750년도)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 전주 이씨와 동래(東萊) 정씨가 처음 정착(하백운천)하였으며 그 뒤 이씨 후손이 마을의 상부에 입주하여 상백운내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1969년 독립가옥 집단화 사업으로 안열(安烈) 마을이 신설되어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의 신선바위에서 선녀들이 섬진강에 목욕하러 하강할 때 이 마을 전체가 흰 구름으로 ‘냇물’과 같이 덮였다하여 백운내라 일컬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백운천 마을로 개칭되었다.

중대리

거석(擧石)마을

조선 18대 현종 때(1670년경)로 추정되는 시기에 파평 윤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48년 여순 사건 때 공비의 침입으로 주민이 소개되었다가 1954년 복원되었다. 마을 중앙부에 크고 둥근 돌이 있었는데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힘을 겨뤄 들었던 돌이 있는 거리라 하여 ‘들돌거리’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음을 따서 거석(擧石)으로 개칭하였다.

중한치(中寒峙)마을

조선 중엽(1670년경) 나주 임씨와 파평 윤씨가 현 중대천(中大川)을 거슬러 오르다 윤 씨는 지금의 거석(擧石) 마을에 머물고 임 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설촌되었으며 점차 마을세가 번창하게 되자 후손들이 인근으로 이주하여 상한재, 도장동 등 별촌을 형성하였으나 같은 마을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백운산 준령을 광양과 왕래하여 오던 유일한 육로인 이 재(峙)가 표고가 높고 북향으로 되어 있어 추위가 심하다하여 추운 고개란 뜻에서 한재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이 이 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중한치(中寒峙)라 한다.

묘동(猫洞)마을

조선 중엽(1,700년경)으로 추정되며 들돌거리(擧石)에 파평 윤씨 후손이 정착하였다. 그 후 난을 맞아 광양 시누봉골에서 윤 씨 일가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자연마을은 따로 있었으나 거석(擧石)과 같은 시기에 설촌되었다. 마을 뒷산의 형상이 고양이 같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묘동(猫洞)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거석 마을과 같이 행정운영을 하다가 1958년도부터 자연마을 단위로 결정되었다.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간전면
  • 담당자 양유진
  • 연락처 061-780-8303
  • 최종수정일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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